[기독교 깨기]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나쁜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는가?

[기독교 깨기]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나쁜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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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가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라지만 한평생 나쁜 짓만 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런가하면 천인공노할 죄를 짓고도 감옥소에서 공짜로 나오는 밥을 먹으며 오히려 감옥소 밖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 팔자 좋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광경을 보며 혹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저렇게 나쁜 인간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인가?” 악당이나 나쁜놈들이 곧장 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며 이들은 도무지 하나님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라나면서 부모님이나 선생님, 또는 어른들께 이렇게 배웠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이 보편적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나쁜 행동을 한 악인들은 노한 하늘에 의해서든 공의로운 하나님에 의해서든 천벌을 받아야 마땅할 터인데 그들 중 대부분은 죄의 대가로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려서 죽기는 커녕 제 명대로 살아간다.

▲ 이미지 - Flickr

▲ 이미지 – Flickr

 

이 물음은 특히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라서 다른 이들을 전도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이 반드시 명확한 해답을 내놓아야하는 질문이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에 대한 실타래를 풀어보자. 누군가가 “하나님이 계시다면서 어떻게 저렇게 나쁜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가?” 라고 물었고, 이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님은 “그래, 좋아. 네 말대로 내가 세상에서 악인들을 다 멸하기로 하지”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2017년 12월 8일 자정을 기점으로 나쁜 사람들을 다 없애기로 하셨다. 2017년 12월 8일 자정이 되었다. 놀랍게도 지구에는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도 역시 지구에서 사라졌다.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이 왜 악인들을 벌하지 않으시는지를 물었던 그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선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에 있는 두 발 달린 종족들은 싸그리 멸망당하고 만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착하고 선한지를 겉으로 보이는 행위와 자신의 상대적인 시각을 통해 판별하지만 하나님의 선악 판단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다. 비록 어떤 이가 다른 이에 비해 좀 더 행실이 바르고, 마음이 착하고, 선행을 자주 했을지라도 모든 것을 칼같이 판단하시는 절대자의 기준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저 나쁜 사람처럼 살인이나 도둑질은 하지 않았는데’ 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보는 죄의 기준과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죄의 기준은 엄연히 다르다. 세상의 법은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품었으나 이를 행위로 옮기지 않으면 죄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절대적인 도덕의 잣대가 되시는 하나님은 죄의 유무를 마음을 통해 정확하게 판단하신다. 신약성서 마태복음 5장에서 그리스도는 실제로 간음을 하지 않았더라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마음으로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런가하면 흉기로 형제를 내리쳐서 죽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형제를 마음속으로 미워한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중 누가 살면서 매력적인 이성을 보고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품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우리 중 누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질투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아무리 지적이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알려진 사람도 이기심이나 탐심, 음욕, 시기심, 미움 등이 마음 속 한켠에서 불쑥 솟아올랐던 경험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사람들 앞에서는 부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거짓을 고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돼 끌려온 여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이 따랐던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즉시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수치스러움과 죄책감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인과 그 여인에게 돌팔매질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으으렁거리고 있는 군중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하신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신다. 그러자 씩씩 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여인을 때려 죽일 듯한 태세를 취하던 군중들은 말 없이 하나 둘 그 자리를 뜨고 말았고, 모두가 자리를 뜨자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을 때 아무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인을 정죄하고 있는 자기 자신들이 그 누구보다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비록 그 여인처럼 실제로 간음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들의 양심은 마음으로 간음하거나 살인했던 경험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푸생'의 , 1635년 作,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 ‘푸생’의 <간음죄로 잡혀온 여인>, 1635년 作,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우리는 악인들이 벌 받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신 “하나님은 왜 대체 나 같은 죄인을 그냥 두시는 것일까?”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남을 지적하고 흉보고 남의 사소한 잘못을 크게 부풀려 타인에게 창피를 주는 대신 교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과 행위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진지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밭을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당장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만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해를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비추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그 분 앞에 돌아오기를 참고 계실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고, 악하고, 성적 타락에 빠져있던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하셨다.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당대의 의인 노아를 제외한 모든 악인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 되셔서 선악간에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밖에는 없다. 악인들이 당장 죽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대신 나 자신부터 하나님께 바로 서고 깨끗한 양심과 행실을 가지도록 의지적 결정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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